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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70년사

고려대 철학과 70년과 한국 동양철학 70년

‘고려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던 1946년 8월, 철학과는 신설된 문과대학에 국문과⋅영문과⋅사학과와 함께 설립되었다. 광복 당시 보성전문학교 교수였던 이종우(李鍾雨), 이상은(李相殷), 박희성 (朴希聖) 등 3인의 학자로 교수진을 갖춘 철학과는 전문학교 2학년을 마친 학생들과 함께 9월부터 철학과 1학년 수업을 시작하였다. 예과를 거친 학생들이 철학과를 선택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48년 9월부터였다. 당시 철학과는 서양철학 전공과 동양철학 전공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2학년까지는 학생들이 수강해야하는 과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무렵 철학과의 동양철학 담당 교수는 중국철학 전공자인 이상은 교수뿐이었지만, 고려대 동양철학의 역사는 한국유학 전공자로 당시 초대 총장을 맡고 있던 현상윤(玄相允) 교수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그리고 1950년대에 인도⋅불교철학 담당의 김동화(金東華) 교수와 노장철학 담당의 김경탁(金敬琢) 교수가 부임하면서 이른바 본교 철학과 제1세대의 진용이 갖춰지게 되었다. 이분들은 1960년대까지 한국철학계의 동양철학 연구를 이끌며 후학들을 양성 하였다.
이분들이 납북(현상윤⋅1950), 전출(김동화⋅1962), 작고(김경탁⋅ 1970), 퇴직(이상은⋅1971) 등의 이유로 철학과를 떠난 뒤 제2세대의 동양철학 교수진을 이룬 학자들이 김충렬(金忠烈⋅중국철학), 윤사순 (尹絲淳⋅한국철학), 김하우(金夏雨⋅인도-불교철학) 교수이다. 이분 들은 1990년대 말∼2000년대 초까지 본교에 재직하며 활발한 학내 외 활동을 통해 본교 철학과를 명실상부한 한국 동양철학계의 중심으로 만들었고, 정년퇴임 후에도 연구 활동을 계속하며 후학들의 모 범이 되고 있다.
이처럼 제1, 2세대의 이름만 상기해 보아도 본교 철학과가 명실상부하게 한국 동양철학계를 선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제3세대는 이러한 선배 교수들의 성과를 바탕으로 출발하였다. 1994년 김충렬, 윤사순 교수에게서 동양철학을 배운 이승환(李承煥, 중국철학⋅비교 철학 담당) 교수가 부임하면서 본교 철학과에 제3세대의 학자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들어 불교⋅인도철학 담당의 조성택 (趙性澤), 도가⋅도교철학 담당의 오상무(吳相武), 한국철학 담당의 김형찬(金炯瓚) 교수가 부임하면서 철학과는 제3세대의 진용을 제대 로 갖추고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그 사이 본교 철학과에서 길러 낸 동양철학 분야의 학자들은 이 미 한국 동양철학계의 주축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본과에서 배출한 동양철학 전공 박사가 70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전국 각 대학에 불교⋅인도철학 담당의 조성택 (趙性澤), 도가⋅도교철학 담당의 오상무(吳相武), 한국철학 담당의 김형찬(金炯瓚) 교수가 부임하면서 철학과는 제3세대의 진용을 제대 로 갖추고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그 사이 본교 철학과에서 길러 낸 동양철학 분야의 학자들은 이 미 한국 동양철학계의 주축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본과에서 배출한 동양철학 전공 박사가 70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전국 각 대학에서 연구 및 교육 활동에 힘쓰는 한편 ‘중국철학회’, ‘한국사상사연구 회’ 등의 학회를 조직해 동문들과의 학문적 유대감을 다지며 활발하게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어 학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제1세대(1945∼1971): 현상윤, 이상은, 김경탁, 김동화

현상윤 선생은 와세다대학 학생시절 100점 만점의 한문과목시험 에서 120점을 받은 탁월한 실력으로, 이미 일제 강점기에 한국유학 사와 한국사상사의 저술을 준비했던 듯하다. 그는 종합대학교로 승격한 본교의 초대총장으로 취임함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조선유학사로 본교 박사학위 제 1호를 기록하고 그 논문을 책으로 출판 하였다. 또한 당시의 강의 노트였던 조선사상사 역시 출판을 준비 하다가 조판 중에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이 노트의 내용은 선생 이 납북된 뒤 다른 원고로 아세아 연구지에 특별 게재되었다. 이 두 책은 모두 두 방면의 효시였다. 효시를 이룬 두 저서는 내용 또 한 매우 충실하였다. 조선유학사는 한국유학을 성리학 중심으로 고찰함으로써 한국유학의 철학적 특징을 처음으로 바르게 드러내었으며, 한국유학이 결코 조선조 패망의 원인이 아니리는 공과론(功過論)까지 곁들임으로써, 한국유학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시도하여 이후 새로운 연구의 길을 터놓았다. 조선사상사는 화랑의 정신 등 에 대한 평가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사상이 본래의 무속적 신교를 바탕으로 유⋅불⋅도를 한국의 여건에 맞도록 수용한 점을 부각시켜, 처음으로 한국사상의 사상적 주체성을 드러내는 관점으로 서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충실한 내용의 저술을 내는데 선구가 됨으로 써, 선생은 전공 분야에서 학문적 개척자 또는 선구자 역할을 다하였다.

다른 한편 그는 공사가 매우 분명한 분이었다. 공무 이외에는 총 장 전용차도 이용하지 않았고, 출퇴근마저 교직원의 통근차를 이용 한 것으로 유명하다. 유학으로 닦은 그의 인격은 타인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였지만, 그가 타인의 존경을 받게 된 이면에는 또 다른 원인 이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이 대학생 때에 감행했던 독립 운동 때문이었다. 그는 와세다대학 학생 신분으로 3⋅1운동의 준비 에 33인 못지않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런 ‘행동하는 지성인’의 상으로 인해 타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처럼 현상윤 선생은 학문과 인격과 용기를 두루 갖춘 보기 드문 분이셨다.
한편, 일찍이 북경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이상은 교수는 중국고대 철학사(유학편)을 저술하였고, 「맹자연구」를 비롯한 수십 편의 연 구 논문을 발표한 성실한 학자였다. 그중 주요 논문들은 영어 또는 중국어로 번역⋅발표되어 외국에도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또한 그는 동양철학자로서 철학개론을 저술⋅강의하였을 정도로 서양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러한 그의 탁월한 학문적 역량으로 인해 자연히 ‘동양철학의 현대화’에도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저서인 동 양사상과 현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교양의 차원에서 중국 철학의 현대적 이해를 도모하는데 공헌했을 뿐 아니라, 논문 「인(仁)과 휴머니즘」처럼 전문적 차원에서도 동양철학의 현대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그의 동양철학 현대화 시도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이점은 미국 하버드대학의 뚜 웨이밍(Tu Wei-Ming) 교수가 1985 년에 낸 저서(Confucian Thought)에 수록한 ‘이상은 교수에게 바치는 헌사’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선생은 동양철학을 현대화하는 측면에서 적어도 한국 철학계에서 일인자이자 선구자로서의 위치를 점하 고 있었다.
그는 본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창설하고 13년간이나 소장으로서 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일(事)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인생관을 가졌던 그는 학자로서 전공분야의 논문만 쓰거나 강단에서 강의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학생처장, 문과대학장을 비롯한 보직을 늘 맡아 수행하였고, 이승만 정권이 감행하던 독재에 대해서는 붓과 행동으로 저항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6⋅25전쟁 중 피난처인 부산에서 이승만이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을 저지르자, 선생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독재를 자행하였던 원세개를 비판한 「원세개론」을 고대신문에 게재하여, ‘고대신문의 폐간’ 사태를 초래하기 도 하였다. 4⋅19의거 때에는 ‘전국교수단 시국선언문’을 직접 기초 하고 그 데모를 선두에서 인도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학자로서의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였다. 4⋅19의거가 성공하여 그에게 문교부장관의 제청이 오자 그는 끝내 사양하였고, 그 후 정년퇴직이 가까웠을 무렵 재단으로부터 총장교섭이 왔을 때에도 끝까지 고사하였다. 그는 학자로서의 영역, 그 엄격한 한계 내에서 행동한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와세다대학 졸업 후 북경 유학까지 한 김경탁 교수 역시 동양철학 현대화에 크게 기여한 분이었다. 사서(四書), 화담집(花潭集),
율곡집(栗谷集) 등 동양고전의 번역과 해설, 중국철학사상사의 편저, 논문 「율곡사상의 연구」 발표 등 교양과 전문이라는 두 차원 에서 동양철학의 현대적 이해에 그가 기여한 공헌은 지대하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노장철학과 주역의 변화철학에 기반을 둔 ‘자신의 생성철학’을 창안⋅제창하여, 현대화된 새로운 동양 철학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A becomes non-A”로 요약되는 그의 생성철학은 당시 학생들에게 분명히 이채로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항상 사색과 집필에 여념 없이 조용하기만 하였던 선생은 학과장 이외에 학교의 어떤 보직도 마다하였다. 교무처장을 맡아달라는 당시 유진오 총장의 요청도 완강히 거절한 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분이었어도 독재에 저항하는 용기만은 결코 타인에 못지않았다. 그는 박정희 정권시절 교수들의 양심선언에 해당하는 선언문에 서명함으로써, 이른바 ‘정치교수’의 낙인을 받고 2년간의 무직상태에서 고난을 감수하였다. 그 역시 학자로서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지성인의 역할에는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동화 교수는 원래 동국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다가 그곳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본교로 오셨던 분으로, 당시 한국의 불교학자로서는 제일인자로 정평이 나 있던 분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일본의 모 불교대학 전임교수였던 선생의 경력도 이를 입증해 준다.
불교개론을 비롯하여 유식철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저술 또한 그가 이 분야의 일인자였음을 증명한다. ‘생불(生佛)’이라는 별명이 딱 어울리는 자비로운 모습의 선생은 “머무르는 곳 어디나 다 나의 거처(집)”라는 자세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본교 철학과를 아끼며 학생들의 지도에 성의를 다하였다. 그의 고결한 인품에서 우러나오는 학은과 훈도를 직접 받은 제자들은 그의 학문 이상으로 그의 인품을 잊지 못한다.
제1세대의 교수들의 지도 아래서 1975년부터 본교 철학과에서 박 사학위자가 배출되기 시작했다. 처음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들은 당 시 본교에 재직 중이던 김영철, 신일철, 윤사순 교수였다. 이듬해에 는 역시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최동희 교수가 박사학위를 받았다. 윤사순 교수는 본래 한국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논문의 제목 은 ‘퇴계의 가치관에 관한 연구’였다. 특이한 것은 영미철학 담당의 신일철 교수와 독일철학 담당의 최동희 교수가 각각 ‘신채호의 역사 사상 연구’, ‘신후담 안정복의 서학 비판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이다. 서양철학 연구에서 연마한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국철학에 관심을 기울였던 당시 본교 철학과의 학문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성 명 학위수여일 박사학위논문제목
申 一 澈 1975. 9. 11 申采浩의 歷史思想 硏究 : 梁啓超를 통한 西歐思想 受用을 中心으로
尹 絲 淳 退溪의 價値觀에 관한 硏究
崔 東 熙 1976. 2. 25 愼後聃 安鼎福의 西學 批判에 관한 硏究


[ 동양철학_70년사.pdf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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