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 70년사
고려대 철학과 70년 – 서양철학
1946년 8월 설립된 고려대학교 철학과가 이제 7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세상이 일곱 번 바뀌고 새로운 세대가 세 번을 등장한 셈이다. 역사에 새로운 것은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선배들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간 후배들의 노고 덕분인가? 세상이 바뀌고, 세대가 달라져도,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을 두루 포괄하며 보편적 진리를 추구해온 고대 철학과의 정신’은 70년의 시간을 두고 면면히 이어져 왔다. 70년의 시간을 지켜온 고대 철학과의 정신이 700년, 7000년을 두고 생생하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난 70년간의 고대 철학과의 역사를 회고해 보고자 한다.
철학과 설립과 초기 역사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은 1905년 법과⋅상과로 출발하여 기실 순수 학문 연구 기관으로서의 모습은 갖추지 못한 채, 그 이름처럼 전문학교의 성격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1946년 철학과를 위시한 문과대학 4개 학과(철학, 국문, 영문, 사학)가 개설되어, 이른 바 중세 대학의 버팀목 역할을 하던 자유교양(ars liberalis)이 강의 되고, 순수 학문 연구가 시작되면서, 보성전문은 비로소 명실상부한 대학(university), 즉 고등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고대 철학과의 설립은 해방 후 출범기의 한국 철학계를 대표하던 몇 분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은 것이다. “일본 경도대학에서 … 헤겔 철학과 실존 철학을 공부하고… 보전에 온 이종우 선생”, “북경대학에서 철학을 연구하고 귀국하여 보전에 온 이상은 박사”, “미국 미시건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보전에 부임한 박희성 선생”이 바로 그분들이다. 철학과는 이렇게 세 분의 전임교수와 함께 출범하였다. 그러나 철학과의 초기 역사와 관련하여 우리는 1933년 보전에 부임하여 “교양과정으로 철학개론을 교수”하였고, “普專論集에 헤겔 철학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던” 안호상 박사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분들은 사회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불안 하던 상황에서 고대 철학과를 출범시켜, 1948년 9월부터 예과를 마치고 철학과를 선택한 학생들을 상대로 철학 교육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출범한 고려대학교 철학과는 1950년 5월 25일에 6명의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다.
철학과 초기의 역사는 출범기의 희망과는 달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예기치 못한 전란으로 휴교가 불가피했고, 철학과 역시 피난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교육에의 열정만은 식지 않아, 이내 대구 최재희 교수의 자택에 “임시 사무실을 열어” 철학과 재건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곧 “대구시 변두리 논밭 지대인 원대동”에 임시 교사를 열어 개강할 수 있었다. 신일철 교수의 회고 에 의하면 “멀리서 들려오는 전란의 포화 소리를 들으며 개강한 피 난 교사에서 교수나 학생들은 유달리 학구열에 불탔다”. 예나의 환란을 바라보며 정신현상학을 집필하던 헤겔의 정신으로, 총알과 포탄이 날아다니던 전쟁터에서 논고를 쓰던 비트겐슈타인의 진지함으로 고려대학교 철학과 제1세대의 교육과 연구가 시작되었다.
고려대 철학과 제1세대(1946년∼1950년대 말)
고려대학교 철학과, 서양철학의 제1세대 교수진은 이종우, 박희성, 최재희, 손명현, 그리고 김준섭이다. 이 분들은 모두 각자의 연구 분 야에서 당대 한국 최고의 학자들이었다. 이 분들의 학문적 업적과 인간적 향취를 하나하나 회고해 보기로 하자.
무엇보다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대구의 임시 교사에서 이종우 교수가 “전교생을 상대로 했던 ‘철학개론’”일 것이다. 이 강의는 개론임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높은 수준을 요구하여 수강생의 태반 이 낙제할 정도로 난해했다고 한다. 또한 이종우 교수가 담당한 철학과의 ‘헤겔철학원강’에서 학생들은 헤겔의 “엔찌클로페디를 독일어로 강독”해야 했는데, 이 역시 수강생 중 “단 2명만이 합격”할 수 있었던 “엄한 성적 평가”였다고 한다. 이 정도의 강의가 서양철학 수입의 초기 단계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당시 고려대학교 철학과의 학문적 수준이 어떠했는지를 쉬이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종우 교수는 1933년 한국 최초의 철학회 인 ‘철학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창간된 철학 제1호 에 「외계 실재성의 근거」, 이듬해에 출판된 제2호에 「생의 구조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실었다. 후에 고려대 문리대학장, 부총장, 대학 원장을 거쳐 총장까지 지냈으며, 저서로는 철학개론(1953), 하늘과 땅 사이에(1971)가 있고,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 「칼 야스퍼스의 철학적 신앙」 등 다수의 연구 논문을 남겼다.
박희성 교수는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주관주의와 직관(Subjectivism and Intuition)」이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46년부터 본교에서 영미철학을 강의했는데, 특히 그 “영어구사능력의 우아함”과 “철인적 인격의 훈향으로 고대생 전체의 우상적 존재”였다 고 한다. 일본을 통해 수입된 독일철학이 한국 철학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 선생은 “홀로 영미철학의 신개지를 개척하여, 우리나라 영미철학의 태두가 되신” 분이다. 학위논문 제목에도 암시되어 있는 바이지만, 박희성 선생에게 가장 중요했던 철학적 주제는 흄의 회의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미국 프린스톤 대학 과 컬럼비아 대학의 초빙교수를 지냈고, 고려대 문리대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선생은 1968년 정년 이후에도 고려대학교 철학과의 명예 교수로 줄곧 대학원 강의를 하실 정도로 정력적인 분이셨다. 특히 선생의 팔순을 기념하여 발간된 철학연구7)에 「정종화 교수의 “‘챠탈레이 부인의 애인’의 경우”를 읽고」라는 논문을 발표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하셨다. 1988년에 작고하시며 적잖은 부동산을 후학들의 학업을 위해 남기셨다. 이를 근간으로 격암장학회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曙宇 최재희 교수는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 칸트 연구의 선구자적 인물이다. 우리말만 가지고는 도무지 칸트의 난해한 철학에 접근할 수 없을 당시 선생께서는 실천 이성 비판과 순수 이성 비판을 번역하여 칸트 연구의 새 길을 열었다. 전자가 번역⋅ 출판된 것이 1957년이고 후자가 1972년이니 각기 50년과 30년을 한 국에서 칸트 철학에로의 통로 역할을 한 셈이다. 이 난해한 두 권의 저서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수십 년간 읽힐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최재희 선생이 “견지해” 온 특유의 “꼼꼼하게, 정밀을 기하는 학구 태도” 때문일 것이다. 선생께서는 그 외에도 칸트의 프로레고메나,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한다, 쉘러의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도 번역, 소개하였고, 윤리학 원론(1958), 사회철학(1963),
헤겔의 철학 사상(1972), 칸트 철학 연구(1985), 헤겔 철학 연 구(1985), 칸트의 생애와 철학: 칸트 연구 입문(1990)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한국철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학술원상을 수상하기 도 했다.
1951년 9월 피난지 대구에서의 개강 후 고대 철학과는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재학생 수는 24명에 불과했지만, 12월에 대학원에 철학과 석사과정을 개설했고, 52년 12 월에는 문과대학이 문리과대학으로 개편되면서 과의 명칭도 문리과 대학 철학과로 바뀌게 되었다. 53년 8월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철 학과는 마침내 2년간의 피난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당시의 감격을 신일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6⋅25 휴전으로 還都가 시작되어 판잣집 대구 피난 교사를 떠나 고대도 서울로 돌아 왔으나 그러나 그때까지도 석탑의 본 교사는 미 제5공군 특수부대가 점유하고 있어서 임시로 중앙학교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兪鎭午 총장을 비롯해서 모든 교수가 유엔군 사령부를 상대로 교사 반환 교섭을 할 때 박희성 교수가 장문의 영문 교사 반환 청원서를 만들었다고 기억된다. 드디어 본 교사 반환의 날이 왔다. 미 제5공군의 교수 대표 1명과 학생 대표 1명이 본교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학생감 鄭在覺 교수를 모시고 학생 대표로 본인이 갔다. 우아한 석탑의 본 교사 앞에서 인수식을 했을 때의 그날의 감격은 한평생을 잊지 못한다”
그렇게 고대 철학과는 다시 안암의 동산으로 돌아왔다. 전쟁의 흔 적이겠지만 “늙은 복학생들이 돌아와” 학생들 간의 나이 차이가 매 우 커졌고, “애기 아버지 학생들과 현역 학생이 섞여서” 강의가 진행 되었지만 철학에 대한 열정만큼은 마치 “열화와 같이 뜨거웠다”. 손명현 선생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분으로 1955년부터 고대 철학과에 재직했다. 줄곧 고대 희랍철학 연구에 몰두하였고, 강의도 희랍철학과 고전어를 맡았다. 지금도 매학기 개설되는 고려대학교의 라틴어 강의는 손명현 교수가 “시작한 것”이다. 1946년 8월 해방 첫돌을 기념하여 발간된 학술 제1집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의 귀납법의 문제」라는 손명현 선생의 논문이 게재되었는데, 이것은 “해방 후 서양철학에 관한 첫 번째 논문”일 뿐 더러,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법이 후세에 발전된 확률론에 의해 비로소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브렌타노의 입장을 밝힌 것으로서 해방 당시 우리 학계의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10)라고 한다. 이렇듯 손명현 선생은 해방부터 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희랍 철학 연구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희랍철학 연구에 몰두하셨지만, 당신이 더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는 브렌타노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었다고 한다. 위의 논문이 브렌타노의 입장을 밝혔다는 사실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진지했고, 그 성과도 다대했지만 손명현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잊지 못하는 것은 그분의 “철인적 풍모”와 “질박한 생활 속에서 오직 학문 연구에만 정진하는 학구적 인격”이다. 문화의 창조(1957), 철학입문(1958), 철학논구(1974) 등의 저서를 남겼고, 아리스토텔레스 시학(1979)의 번역은 지금도 그 탁월성이 인정되어 학술적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또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우리 땅 에 소개한 업적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한 김준섭 교수가 1947년에 고대로 부임해 “영미철학, 논리학”을 강의하고, “기호논리학을 전파”하는가 하면,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소개”하여 큰 반향을 얻기도 했다. 무엇보다 김준섭 교수의 학문적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1949년 의 서양철학사의 출간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우리나 라 최초의 서양철학 통사”이기 때문이다. 김준섭 교수는 그 외에도 실존철학(1958), 현대철학(1958), 철학의제문제(1964), 윤리학(1966), 철학과 논리의 연구(1975), 논리연구(1985) 등의 저술을 남겼고, 한국철학회 회장과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을 지냈다. 같은 시기에 고대 철학과에는 “일본 상지대학에서 철학과 교육학을 전공하고” 후에 “고대 교육학과를 만든” 왕학수 교수가 강의하고 있었고, 연세대의 김형석, 전원배 교수가 출강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철학과 제1세대가 이룩한 무수한 학적 중에서 강조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철학연구(고려대학 교철학회 편)의 창간일 것이다. 철학연구는 1955년 12월의 제1집을 신호탄으로 하여 철학연구의 발간이 고려대학교 철학과 부설 철학연구소로 이관되던 1996년 이전까지 18집에 달하는 학술지를 발간하였다. 이 중에서 고려대학교 철학과 제1세대의 학문적 업적이 게재된 것은 1960년에 발간된 제3집까지이다. 여기에 수록된 제1세대 의 주요한 연구 업적은 제1집에 손명현 교수의 「뮤토스와 로고스」, 최재희 교수의 「자유의 근거와 현대」, 제2집에 손명현 교수의 「논리 실증주의」, 제3집에 손명현 교수의 「회의사상의 고찰」, 박희성 교수 의 「위대한 비극 ― 4⋅19학생운동의 의의」, 이종우 교수의 「정치권력과 종교사상」 등이다. 4집 이후의 주 필진은 고대 철학과 제2세대이나, 이미 1집부터 2세대 철학자들의 글이 실려 있어 이미 이때 가 고대 철학과가 탄생 10년을 넘기며 첫 번째 세대교체를 맞는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서양철학_70년사.pdf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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